호도협 가는 길 :: THERE
AROUND, Marc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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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협 가는 길
`호도협 가는 길`
여기는 고성이 아니잖아
아름답지만 낯설지 않은
게으른 여행자의 아침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서
한 도시에서 여행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여행을 하다 보면, ‘이 것만으로도 이 동네를 알 것 같아.’ 하며 확신에 찰 때가 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걸으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몇 가지 증 거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상상해봤다. 물론, 이 건 한 여행객의 어설픈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터미널에서 기사는 고성으로 가자는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우리는 흥정을 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낡은 승합차를 개조한 사설택시였다. 먼저 탄 중국인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우리를 경계했다. 내가 웃긴 표정으로 인사하자 앳된 얼굴의 그녀는 수줍은 듯 조금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아기를 얼렀다. 택시는 시내를 벗어나 황량한 시골길을 달렸다. 창밖으로 낯익은 농촌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인을 내려주고 한참을 더 간 곳에서 기사는 차를 세웠다.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고성,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고성이 아니었다. “저 건물은 기차역이잖아. 왜 우리가 여기에 온 거야?” 내가 다그치자 기사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자를 보여주며 다시 고성, 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종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릴없는 침묵이 흘렀다. 알고 보니 고성을 발음하는 ‘구청’과 기차를 발음하는 ‘후어처’를 헷갈린 탓이었다. 기사는 다시 터미널로 돌 아가자는 요구에도 대답하지 않더니 결국 기차역 광장에 우리를 버려둔 채 도망치듯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겨우 배낭을 들고 광장 구석 벤치에 가 앉았다. 해가 지기 전에는 고성에 도착해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중국 동쪽 다롄에서 리장까지 여섯 개의 도시를 매번 10시간이 넘게 이동을 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떠나야 하는 상황이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생각해도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로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눈물까지 흘려대며 웃었다. “진심이야? 이게 웃기다고?” 말로는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아무래도 너무 지친 나머지 웃음과 울음을 잠시 헷갈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웃음을 그치더니 정색을 하며 기차역 방향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기차역의 문이 열리며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나 오고 있었다. “망했어.”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렇게 중얼거렸고, 몰려오는 인파 속에 파묻히는 건 아주 잠깐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옥룡설산’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히말라야를 생각했다. 고대 사람들은 그곳을 ‘눈의 거처’라고 불렀다. 하얀 다락방. 만년설에 갇힌 사람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까. “설산이 보이는 협곡으로 갈 거야. 그게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위대한 일이 될 거야.” 나는 말로에게 바로 그 설산이 히말라야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게 정확한 정보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어떤 거창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호도협’이라고 불리는 협곡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에 고성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거리는 이미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들로 만원이었다. 꼬치를 하나씩 입에 물고 홍등으로 물든 돌바닥을 걸었다. 왜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어를 말하는 남녀의 뒤를 밟았고, 그들의 숙소를 알아낸 다음 한동안 밖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맥주를 사들고 별 모양의 모빌이 보이는 거리에 앉았다. 건달처럼 담배를 피웠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이곳은 유령들의 아름다운 고성이며 동시에 쇠망한 테마파크의 잔해였다. 이곳은 몸이 투명해지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지나간 여정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다롄으로 향하던 밤바다의 적막함으로 시작해 도시마다 만났던 다정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운이 좋아. 중국을 여행하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거든.” 그런 말을 하며 말로는 아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도 그는 바로 전 도시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우리는 여행이 끝나고 난 뒤 서로의 행방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불투명한 내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는 것. 그건 여행자가 절대 해서는 안 될 실수 중 하나였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져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말로 역시 비슷해보였다. 설산을 보면 모든 게 나아질까.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게스트하우스 여주인 ‘마마’는 나에게 게스트들과 함께하는 파티에 참석해달라고 말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 아침 일찍 협곡으로 떠나야하거든. 미안해 마마.” 방으로 올라가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창문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침낭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설산이 보이는 협곡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그런 다짐을 하며, 아름답지만 낯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이 오자 분주해졌다. 호도협으로 직행하는 여행자버스 시간이 아슬아슬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알람을 누가 끈 거야.” 그런 식의 불평을 해봤지만, 알람이라고 해봤자 모조품 가게에서 산 싸구려 전자시계가 전부였기에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는 힘들었다. 그보다 새벽 시간에 배정된 버스를 탄다는 것 자체가 게으른 여행자 듀오에겐 커다란 도전일 터였다. 우리는 재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버스가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어 자리에 멈춰 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카메라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한참을 더 달리던 말로가 멀리에서 나를 보며 소리쳤고, 나는 최대한 불쌍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가 알아채기를 기다렸다. 그는 무언가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다가왔다. 나는 카메라를 가지고 올 테니 먼저 가라는,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게으른 여행자의 아침 하며 허둥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말로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문 다음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숙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뛸까?”라고 말했고, 그는 “버스는 포기해. 나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어.”라고 대답했다. 멋진 녀석. 우리는 숙소에 도착해서 카메라를 챙기고 화장실에도 다녀왔다. 그러고 나서 시계를 봤는데 아침에는 그렇게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겨우 5분 정도밖에는 더 지나지 않은 상태였 다. “차라리 아주 늦어버렸으면 상관이 없겠는데 말이지.” 말로 역시 불확실한 희망 때문에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됐어, 그냥 밥이나 먹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검게 탄 빵과 잼, 멀건 죽이 동시에 나오는 이상한 식단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텅 빈 식당을 돌아보는데, 부스스한 머리로 나타난 마마가 나를 보더니 어째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마침 말로는 또 다시 화장실에 간 상태였고, 나는 그쪽을 가리키며 친구가 배앓이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차를 놓쳤다고 말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없을까 마마?” “터미널에 가봐. 거기라면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 말로가 화장실에서 나왔고, 마마는 그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 아직 갈 수 있다는데?” 내가 말하자, 말로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콜.”
왜 그렇게 아침부터 소란을 떨었던 걸까. 터미널에는 호도협으로 가는 버스가 꽤 많았다. 우리 외에 다른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1박 2일안에 트레킹 코스를 완주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들을 새벽의 버스로 이끌었을 거라고 우리는 추측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많은 우리는 조금 여유를 부려 2박 3일로 나눠 협곡을 걷자는 데 합의했다. 버스는 2시간여를 달려 호도협 입구에 섰다. 그곳에 내린 건 커다란 배낭을 멘 우리뿐이었다. “준비 됐지? 여기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트레킹 코스야!” 우리는 기합을 넣으며 호기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파이팅이 무색할 정도로 무난한 코스가 이어졌다. 나름의 경사가 있지만 무리가 없을 정도였고, 어느 정도 길을 따라 오르자 발밑에는 누런 ‘금사강’이 굽이굽이 흘러 심심하고도 멋진 풍경을 연출했다. 게다가 강 건너에는 옥룡설산이 묵직하게 자리 잡은 채 비현실적인 위엄을 뽐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기 옥룡 머시깽이를 오르는 게 아니라 그저 곁에 두고 걷는다는 말이지?” 말로가 물었고, 나는 “당연하지 저기는 일반 사람은 못 올라. 저기는 엄홍길 선생 같은 베테랑이나 가는 곳이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곳 역시 트레킹 코스가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그저 둘러대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출발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첫 번째 숙소에 닿을 수 있었다. ‘나시객잔納西客棧’이라는 이름의 작은 숙소에는 몇몇 중국인 청년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곳은 무지개가 예쁜 곳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직 더 걸을 수 있지 않아?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잖아.” 말로가 말했다. 하지만 뭘 모르는 소리였다. ‘28밴드’라고 불리는 지옥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체력 보충이 필요했다. 더구나 그대로 출발했다가는 거의 저녁 무렵에나 다음 숙소에는 도착할 터였다. 우리는 ‘토마토달걀볶음밥’을 함께 나눠먹고 맥주를 하나씩 시켰다. 그런 다음 설산이 천천히 저물어 가는 걸 구경했다. “설산도 밤이 되면 어둠 속에 묻히는구나.” 창턱에 맥주 병을 올려놓으며 말로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느끼한 말을 잘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서 자자. 내일부터가 진짜야.” 나는 전자시계를 풀어 머리맡에 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꼭 성공적으로 일어나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다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March 2015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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