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곳으로 (필리핀 마티섬) :: THERE
AROUND, Novembe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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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곳으로 (필리핀 마티섬)
Way to a small island 다섯 번의 귀갓길
1월에 시작된 여름의 여행
내일은 없다!
실내에서 한 여행
섬을 향해서
구글 지도를 켜고 가끔 세계 곳곳을 훑어본다. 화면 안에 있는 건 그저 그림일 뿐이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거나 유명한 해변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계속 보게 된다. 간혹 이미 가본 곳이 눈에 띄기도 한다. 묘한 기분이 들어 확대해 보면 낯익은 지명이 쓰여있고, 어려운 단어라 할지라도 나는 그걸 쉽게 따라 읽을 수가 있다. 예전에 수없이 뱉어냈던 단어니까. 화면 속 그림은 사진도 되었다가 영상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짜릿한 기분. 한 번은 파랗게 색이 입혀진 바다 부분을 보고 있는데, 확대해 보니 없던 육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서해를 여행하고 싶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숨어 있는 섬을 찾곤 했는데, 이 섬은 서해의 작은 섬들보다 훨씬 작았다. ‘얼마나 많을까, 이렇게 작은 섬들이’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든다. 완니반Waniban. 그 섬의 이름은 바로 완니반이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
지난겨울이 거의 잊혀진 뜨거운 여름에 우리는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필리핀으로 날아가는 항공티켓. 눈 내리는 1월, 방안에 난로를 켜고 누워서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내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일단 끊어놓자. 못 가면 그만이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6개월 동안 간절히 빌었는데 하나님과 부처님 모두 나를 도와주셨다.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저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온 마닐라행 티켓 때문이었지만, 애초에 나는 그곳에 관심이 없었다. 섬나라 필리핀, 그 안에 보석처럼 흩어져 있을 수많은 작은 섬들이 나를 흔들고 당겼다. 그건 언 제나처럼, 묻혀 있는 것들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구글을 켰고, 보이지 않는 섬들의 이름을 찾아 노트에 옮겨 적었다. 나중에 그걸 따로 검색해 보며 줄을 그어 버리기도,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찾은 곳은 완니반,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작은 섬이었다. 국내 포털사이트를 뒤져보면 단 하나의 리뷰가 나오는데, ‘현지인 친구가 데려가 준, 현지인들만 아는’ 뭐 그런 식으로 적어놨을 뿐이었다. 어쩌면 글을 쓴 사람은 그 작은 섬보다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잠자는 공룡’에 더 주목햇을지도 모를 일이다. 각자의 취향이라는 게 없는 거니까. 그래도 그가 섬에 도착해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은 정말 멋졌다. 특별한 기술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 주변이 어떤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후쯤이었는지 샛노란 햇살이 물 위로 부서져 있었고, 작은 나무배들이 그리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섬은 고운 모래와 열대나무들로만 이뤄진 것처럼 단조로웠고, 자세히 보면 누군가 나무 사이에 걸어놓은 그물이 해먹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섬 전체가 프레임 안에 들어온 사진에서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기준 삼아 섬의 크기를 대충 가늠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저만한 크기의 배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섬이었다. 아무튼 그곳의 사진을 몇 번이고 봤다. 뭐랄까, 너무 작은 섬이어서 그렇게 자꾸 보지 않으면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았다.
완니반까지 가는 길은 꽤나 긴 여정이었다. 인천에서 마닐라까지 4시간 정도가 걸렸고 다바오Davao까지는 국내선으로 1시간 40분 거리였다. 다바오 공항에서 다시 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해안에 도착해서는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를 빌려야 했다. 해변에서 섬까지 걸리는 시간은 알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이 여행에 함께했는데, 모두 동네 친구들이었다. 호흡이 척척 맞는다거나 원하는 게 비슷해서 모인 건 아니었고, 아마 모두들 마닐라행 티켓이 싸다는 얘기에 일단 발을 담갔을 것이다. ‘오늘은 다른 동네에서 한번 마셔볼까?’ 그 정도 마음으로 가방을 꾸린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무인도까지 가보겠다는 큰 욕심을 혼자 부리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인천공항에 모인 우리들은 꽤나 신나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웃고 뒤통수를 때려도 그냥 넘어가고 그랬는데,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대기시간이라든지 총 이동 거리, 환승 횟수 같은 걸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좀 예민해져서 틈틈이 울고 짜증 내고 토하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가서 알아보자.” 여행 내내 그런 식으로 상황을 넘기곤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바로 고단한 여행을 이어가게 해주는 주문 같은 대사였다. 물론 가서 알아보자는 식으로 여행이 지속될 순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탄두아이anduay(사탕수수를 증류해서 만드는 필리핀의 럼Rum), 펀다도르Fundador(필리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브랜디Blandy), 레드홀스Red Horse(필리핀에서 생산되는 라거맥주, 알코올 7~8도 정도로 도수가 높다.) 같은 마법의 물도 계속 마셨다. ‘내일은 없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다시 첫날 얘기로 돌아가자면, 인천 공항에서 아침 8시쯤 출발한 우리는 다바오 공항에 저녁 8시쯤 도착했다.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가는 동안 누군가 멀리 여행 온 것 같지 않아 이상하다고 말했다. “영월 가는 길 같아.” 다들 웃었지만, 잠시 후 친구들은 각자 앉은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공간에 왔다는 걸 몸이 잘 기억할 수 있게 일일이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이국에서의 숙소는 내게 또 하나의 여행지로 인식될 정도로 즐거운 공간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주거공간’이라는 공통 범주로 묶여 있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낯선’ 것들뿐이다. 수도꼭지가 왜 이렇게 생겼지, 변기 물 내리는 게 왜 여기 달려 있는 거야, 신발 벗지 말라고? 그런 질문들을 잔뜩 던지는 동안 이곳 사람들의 행동양식 같은 게 머릿속에 대충 그려진다. 그런걸 근거로 이곳에서 내가 지켜야 할 규칙이라든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 같은 걸 짐작해 보는 일이 꽤나 즐겁다. 물론 쉽진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두 개의 숙소를 각각 이틀씩 예약했다. 다바오에서 첫날과 마지막 날을, 완니반 근처의 해안가에서 이틀을 보낼 계획이었다. 다바오의 숙소 ‘레드 나이츠 가든Red Night Garden’은 수영장이 딸려 있었고, 마티Mati에 있던 숙소 ‘블루 블레스 비치 리조트Blue Bless Beach Resort’는 문을 열면 바다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었다. 수영을 좋아하는 우리는 틈만 나면 뛰어들었는데, 옷을 갈아입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수영복 차림을 한 채 생활하곤 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그저 꺼내기 편한 상태로 짐을 늘어놓고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다. 맥주병이 있으면 누가 먹다 남겼는지 묻지 않고 마셔버렸고 음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창문이었는데, 크기나 모양은 제쳐두고서라도 전부 똑같은 하얀 플라스틱 새시가 아니라는 점에 감사했다. 나무로 된 창틀은 그리로 들어오는 햇살과도 잘 어울렸고, 밖으로 내다보이는 바다의 색과도 조화로웠다. 우리는 창문 주변에 앉아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밤늦게까지 얘기도 나눴다. 리조트에서는 대부분의 식사도 해결했다. 다섯 명이 호화롭게 먹는 한 끼에 보통 1천페소(43페소가 한화로 1천원) 정도가 나왔다. 맥주도 맘껏 마셨는데 2만 5천원 정도라니. 그런데 나중에 거리로 나간 우리는 그동안 좀 지나치게 사치했다는 걸 알게 됐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부자가 된 느낌은 처음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한 친구의 말에 뭉클한 마음이 들어 그냥 이대로 지내기로 했다. “마음껏 즐기라고 친구.” 어차피 며칠이 지나면 꿈처럼 느껴질 일이었다.
여행 셋째 날이 밝았을 때 우리는 ‘오늘쯤 완니반에 가겠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숙취에 시달리는 사이 시간이 휙 가버렸다. “내일 가지 뭐.” 역시 그런 식으로 매듭을 짓고 우리는 근처 해변에 가보기로 했다. 리조트 근처에는 ‘다히칸Dahican’이라는 유명한 해변이 있었다. 숙소로 들어오던 도로를 되밟아 가다가 야자수 숲 사이로 난 길로 빠지면 나오는 곳이었는데, 현지인들뿐 아니라 유럽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과일을 사 먹고, 나무로 된 작은 서핑보드를 빌렸다가 창피를 당하고, 현지인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필리핀의 바닷물이 어찌나 짜던지 그걸 두세 모금 마신 친구들은 속이 안 좋다며 그대로 모래 위에 누워 버렸다. “오늘은 술 안 마실래.” 그런 얘기를 할 정도였으니, 아마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린 또 술을 마셨고 역시 다음 날도 숙취가 있었지만, 아침 9시에 드디어 작은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여행의 넷째 날, 이틀 동안 멀리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그리고 겨울서부터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방향으로 드디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설레고 행복했던 순간이 이곳 필리핀에서 많았기 때문에 ‘꼭 완니반에 닿기 위한 여행은 아니야’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여유를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이 그저 좋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배를 타고서 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기분이 묘했다. 사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설렘과 함께, 어쩌면 저 섬이 내가 찾던 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불안함도 있었다. “꾸야(‘아저씨’ 정도의 호칭), 저 섬을 이곳 사람들은 뭐라고 불러?” “완니반. 어떤 사람들은 그냥 스몰 아일랜드라고 말하기도 해.“ 그 섬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굴었지만, 나는 가슴이 막 뛰어서 아마 표정에는 티가 났을 것이다. 섬 가까이 배가 닿았을 때 해변에는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구는 내성적인 아이처럼,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 개에게 손 내밀어 턱이나 만지고 있었다.
여행은 어쩌면 한 장 사진을 나름 해석하는 일, 일상 속에서 며칠 몇 달 간 귀하게 굴려 한번 찾아가보는 일 그리고 함께한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하고 평생 들먹이는 일.
November 2015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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