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주는 위로 :: THERE
AROUND, January 2016
-
집이 주는 위로
집이 주는 위로
아닉Annick 아주머니의 집
두 번의 이사
열흘간의 동거
그리고 헤어짐
프랑스로 유학을 온 첫해에 나는 불어로 된 책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고, 밤이면 홀로 가보지 못한 먼 이국땅을 상상했으며 날이 서늘해질 때면 해 질 녘 거리를 산책하곤 했다. 하지만 무엇에도 쉬이 만족하지 못했고 가슴속 헛헛한 마음은 도무지 채워질 줄 몰랐다. 그럴 때면 방 침대에 가만히 누워 아 득히 먼 곳,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나의 고향 집을 생각하곤 했다. 눈을 감고 그곳을 한참 생각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이곳에도 저곳에도 없는 사람, 이곳에나 저곳에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따금 고향 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집 생각이 주는 위로를 받으며 프랑스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다섯 평 남짓한 이곳의 집들에도 내가 사랑한 시절,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이 지척에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글·사진 강아름 에디터 박선아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한 허름한 건물 다락에 짐을 풀었다. 침실에는 하늘로 난 창이 있어 침대에 누우면 늘 달이 커다랗게 보였다.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밤이면 알 수 없는 소리에 공포를 느꼈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혼자 지내는 것이 버겁다고 생각한 나는 그 어여쁜 창이 있는 다락에서 나오기로 했다. 얼마 후,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고 어학원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집엔 프랑스 아주머니 아닉이 혼자 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돌아와 아주머니의 저녁상 차림을 도와드린 후, 식탁에 마주앉아 느린 저녁 식사를 했다. 주말이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 아래 강가로 나가거나 가까운 산에 오르며 서로에게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당시 그런 삶의 리듬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따금 외로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럴 때면 한국어로 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창으로 난 밤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아주 소박했고 따뜻했으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뭉클하기까지 했다.
1949년 문을 연 이래 올해 여름까지 운영되었던 예술전문서점이다. 1층에는 미술사, 철학, 문학 전반의 다양한 이론서가 있고, 2층에는 미술, 건축, 사진 등 예술 관련 책이 가득했다. 수업에 필요한 책이나 논문에 참고할 만한 책을 사러 수도 없이 들락거려서 나름대로 추억이 쌓였던 곳인데, 슬프게도 찾는 이들이 줄어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역사적인 책방은 언제부턴가 지식인들이 찾는 곳이 아닌 관광객들이 구경하러 오는 곳이 되었고, 그 때문에 수익을 낼 수 없어 지속적인 운영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방대한 책들은 퐁피두 센터의 서점 두 곳으로 나누어 들어가게 되었고 건물은 시에 소유권이 넘어가 다른 용도로 사용될 예정이다.
파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벨기에행 기차표를 알아보는 중에 덴마크에서 온 동갑내기 친구 씬Signe이 자신의 집에서 며칠간 함께 지내자고 했다. 그 친구는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동거Collocation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친구가 2주간 스위스에 가 있게 되어 방이 빈다는 것이었다. 이방인의 몸으로 낯선 도시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우리는 이제 곧 헤어질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서둘러 짐을 싸 들고 씬이 사는 동네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씬과 나의 열흘짜리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매일 푹 끓인 오트밀에 과일을 넣어 아침을 먹었고 거실에 오래된 턴테이블을 켜 놓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도 읽고 낮잠도 자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은 친구들을 불러 작은 파티를 열었고 또 다른 날은 우리만을 위한 근사한 저녁상을 차리기도 했다. 조개껍데기를 비누그릇으로 사용하고, 식물을 이곳저곳 가지 쳐 놓고, 오랜 세월을 담은 나무 가구들이 합을 이루는, 그리고 화장실엔 어느 먼 곳의 섬 지도를 척 붙여 둔 사랑스러운 내 친구의 집. 나는 그곳에서 매일 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다락으로 향했다.
현재 지내고 있는 집은 벨기에의 작은 시골 마을 투비즈Tubize에 있는 옥탑이다. 사정이 생겨 한국에 들어가기 전 두 달여간 이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선 침실 천장에 난 비스듬한 창 사이로 마을 성당의 종탑이 보이고, 아침이면 그곳의 종소리가 잠을 깨운다.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나는 곧 이 모든 것을 남겨둔 채 여기를 떠날 것이다. 그래서 그저 침대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려지는 지난날의 나의 흔적, 벌써 이 사소한 몸짓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집이란, 나의, 나를 향한 그리고 나를 둘러싼 비밀스러운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한 시절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가 그 언젠가 사라져버릴, 멀어지고 나면 다시는 맡을 수 없을 향과 같은 것. 영영 돌아오지 않을, 그래서 사무치게 그리운 시간. 그 모든 조각을 집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오랜 시간 몸을 뉘었던 집들과 헤어질 때마다 나는 깊게 슬퍼지고 만다. 떠남과 동시에 반 토막이 나버릴 내 초라한 기억력은 나를 금세 무력하게 만들고, 그 무력함을 그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밖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테니까.
January 2016
THEREZINE
남은 글자 수 : 400
에디터가 추천하는 THERE Activity
등록된 액티비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