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집에 대한 이야기 :: THERE
AROUND, Marc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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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집에 대한 이야기
세 집에 대한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집은
우당탕탕 집구하기
쉼을 주는 집
엄마는 늘 당신의 어린 시절 살던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집다운 집에서 자란 아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추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진작 깨달은 것이다. 엄마가 생각한 집다운 집이란 으리으리한 곳이 아니라, 작은 마당이 있고 무언가 우리만의 것들을 가꾸고 심을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나 역시 엄마처럼 그런 집을 꿈꾸고 있다. 글·사진 김주영 에디터 김건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일곱 살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유년시절의 추억은 내가 제일 오래 살았던 그 집에서의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곱 살 때 이사를 갔던 집은 같은 서울에 있었지만 집 앞뒤로 마당이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타샤 튜더Tasha Tudor’가 롤 모델이었던 우리 엄마는 마당에서 화초를 키울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셨다. 작은 텃밭에 나무와 화초를 심어 살뜰하게 가꾸고, 철마다 잎채소와 열매 맺는 모종들도 가득 심었다. 저녁상에는 항상 밭에서 난 푸성귀와 된장이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그중 포도나무가 가장 성과가 좋았다. 작은 묘목으로 심었던 포도나무는 빠른 속도로 쑥쑥 자라났다. 점점 넓어져 가는 덩굴이 감당이 안 돼 옥상에서부터 길게 줄을 연결해 대주었더니 포도 덩굴은 옥상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뻗어나갔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내는 포도 열매는 그 양이 엄청났는데 그 중 햇빛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란 옥상의 포도는 정말 탐스러웠다. 열매가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우리 가족은 옥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초록색 포도알이 진한 보라색으로 바뀌며 단내를 폴폴 풍길 때면 엄마는 송이를 톡톡 잘라 우리에게 건네주곤 했다. 아빠는 무언가에 한번 꽂히시면 그것만 질리도록 하는 성격이었다. 바둑, 축구 등 근 10년 주기로 취미가 바뀌셨는데 바둑이 취미였을 때는 우리집에 다양한 모양의 바둑판이 다락에 한 가득이었고 날마다 기원으로 출근하셨다. 집에 오시면 바둑방송을 시청하고, 급기야는 컴퓨터까지 배워 컴퓨터로 바둑을 두었다. 더 어렸을 때 아빠의 취미는 ‘진돗개 키우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메리, 해피, 백구, 진순이 등 수많은 진돗개와 함께 자랐다. 아빠는 주말마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개를 보러 가시기도 했다. 아빠가 가장 예뻐했던 ‘진순이’는 마당 한쪽 자신의 집에서 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강아지들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나는 학교에서도 수업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강아지들을 떠올렸다. 수업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책가방은 제멋대로 내팽개치고 마당으로 달려갔다. 이가 나기 시작하며 강아지들은 엄마가 공들여 키우던 감나무 묘목을 다 물어뜯어 놓았다. 감나무는 3년생 이후에 열매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해가 바로 3년이 되던 해였다. 그 일로 엄마는 강아지들을 빨리 팔아버리라며 잔소리를 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진순이와 강아지들을 위해 고깃국을 끓여주시며, 누구보다도 강아지들을 아끼셨다. 엄마가 옷을 재단할 때 쓰는 초크를 몰래 가져와 마당을 스케치북 삼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김장을 하고 마당 구석을 파내서 장독대를 묻었다. 사시사철 집은 바쁘게 돌아갔다. 어렸던 동생과 나는 딱히 거들 일도 없으면서 무슨 일만 생기면 덩달아 신나서 설쳐대곤 했다. 오래된 집은 여기저기 고장이 잦았다. 보일러는 툭하면 고장이 났고 마룻바닥은 늘 삐걱거렸다. 결국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오래된 집을 부수고 다시 짓기로 결정을 했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 저마다 원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집은 아주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나는 큰 창을 원했고, 내 방에는 큰 창문이 생겼다. 하나뿐인 화장실 때문에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라 그 시절에 흔치 않게 화장실을 두 개로 만들기도 했다. 부모님이 집을 단지 돈으로만 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개발이 시작되며 얼마 후에 어쩔 수 없이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했다. 아파트 생활은 확실히 단독주택의 생활보다 훨씬 편하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 가족은 사진으로만 남은 오래된 집을 떠올리며, 그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엄마는 또 어린 시절 살던 시골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그러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추억이 많다는 것을 진작 깨달은 것이었다. 추억과 경험이란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내가 20세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건 큰 행운이었다.
남편과 나는 4년 전에 태국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이사를 거의 다니지 않았던 나는 태국에서의 지난 4년 동안 무수히 많은 이사를 다녀야 했다. 처음 7개월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방콕 외곽지역에 위치한 작은 빌라에 거처를 두었다. 당시에는 장기적으로 태국에 머물 계획이 없었던 터라 가구나 살림들은 거의 없었어도 만족하며 지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점차 바뀌어갔고, 7개월의 태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가 모든 세간과 재산을 정리해 5개월 만에 다시 태국으로 들어왔다. 우선 작은 아파트를 하나 렌트해서 지내며 장기적으로 머물 집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들이 방콕에 놀러 올 때면 원룸 아파트의 한쪽을 내주기에는 곤란했고, 마땅히 추천할 만한 저렴한 호텔이나 깨끗한 게스트하우스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큰 집을 렌트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기왕이면 어릴 때 살던 집처럼 무언가 가꾸고 심을 공간이 있는, 집다운 집을 찾고 싶었다. 방콕에 와보니 한국처럼 아파트가 날마다 들어서고 있었다. 이러다 언젠간 방콕도 성냥갑 도시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집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던 우리는 무작정 돌아다니며 렌트 나온 집을 기웃거렸다. 하루에 대부분을 걸어 다니며 찾다 보니 체력적인 한계가 왔다. 우연히 부동산 사이트를 알게 되고 원하는 집의 타입과 방의 개수와 지역을 입력하니 렌트가 가능한 집들이 뚝딱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였다. 원하는 집을 발견해도 전화해서 물어볼 만한 언어 실력이 아니었기에 통역을 해줄 지인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찾은 집의 리스트를 뽑아 그녀가 쉬는 날인 토요일에 만나서 쭉 전화를 돌렸는데 조건이 좋은 집들은 금세 나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매번 일일이 연락해달라고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직접 움직여야 일이 진행되겠다 싶었다. 라면 부스러기 같은 태국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때라 영어로 문자를 남겼다. 그러나 문자를 보내보아도 답변이 오는 곳은 10군데 중 한 2~3군데 정도였다. 그나마 연락이 온 곳들은 거의 부동산인데 답변은 모두 이렇다. ‘그 집은 이미 렌트됐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면 찾아주겠다.’ 즉, 낚시성 매물을 올리고 연락이 오면 그걸로 다른 집을 찾아주겠단 얘기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태국에서는 집을 찾는 사람은 부동산 중개비를 내지 않는다. 집주인만 한 달 치 월세에 해당하는 중개비를 내기 때문에 중개인을 통해 집을 찾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에 나는 집을 알아보느라 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주변에서 태국어가 왜 이리 늘었느냐며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날마다 구글맵과 지도를 끼고 산 덕에 방콕의 지리도 한 번에 그려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집 찾는 것에도 점점 지쳐가고, 부동산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던 때. 타협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끊임없이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던 한 부동산이 있었다. 그토록 내가 까다롭게 굴어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매물이 나온 집 사진을 보내주었고, 결국 그냥저냥 괜찮은 집이 있어 보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집은 3층집이었고 BTS 지상철 역에서 가까웠다. 작은 가든도 하나 있었다. 내가 원하던 조건 그대로였다. 여태까지 보았던 현대적인 느낌의 집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국의 옛날식 집이었는데,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큰 골목 초입에 레지던스가 많아 여행자와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현지인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은 47세의 잘생긴 타이완 아저씨였다. 4살 때부터 태국에 살았으며 태국어를 비롯해 중국어와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한다고 했다. 17년이나 된 집이었지만 본인이 직접 구상하고 지어서인지 무척이나 깔끔했다.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고, 어느 곳에서 음악을 들으면 음향이 좋은지, 어느 포인트의 뷰가 예쁘고 어느 창문을 열어두면 시원한지, 정원의 나무에 물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등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달랑 캐리어 두 개로 태국 땅을 밟은 지 고작 1년 반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슨 짐은 이리도 많아진 것인지, 트럭 한 대를 꽉 채워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1년의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운 집이었지만 역시 오래된 집이라 날마다 관리인이 들락날락할 만큼 잔 고장이 많아 결국 네번째 이사를 해야 했다.
태국어도 그사이에 많이 늘고, 방콕생활에 적응해서인지 네 번째 집은 지난번 집보다는 어렵지 않게 구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건물에 붙어있는 임대광고를 보고 전화를 해 집주인과의 약속을 잡았다. 건물 내부도 생각보다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어 바로 계약을 했다. 총 5층짜리 건물에 1층에는 스튜디오와 카페를 만들었고, 2층에는 작업 공간, 3층에는 사무실, 4층과 5층은 주거공간으로 쓰기로 했다.(태국에서는 렌트를 할 때 층 단위의 계약이 어렵고 보통 건물 전체로만 계약을 한다.) 두 마리의 고양이 식구가 생기면서 이들은 1층에서 5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느라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쁘게 지낸다. 집 앞 처마 아래에는 두세 마리의 개들이 더위를 피해 항상 누워있다. 카페는 제법 입소문이 나서 한국에서 여행객들이 자주 방문을 했다. 로컬 지역의 한적한 동네가 마음에 들고 BTS 역과도 가까웠고, 나는 이곳을 찾을 여행객들을 위해 작은 아파트를 렌트해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기로 했다. 여행을 가게 되면 현지인처럼 지내보고 싶은 마음에 가끔 에어비앤비를 이용하기도 했었는데 방콕은 호텔사업이 크게 발달한 도시이다보니 그런 형태의 숙소를 찾기가 의외로 어려웠다. 침실이 하나 있고 주방과 거실이 있는 아파트는 아담하지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깨끗하고 시설이 좋았고, 단지 내에 수영장과 헬스장도 갖추어져 있었다. 6개월만 운영하려던 게스트하우스는 어느덧 1주년을 지나가고 있다. 우리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여행객들은 정말 현지인다운 여행을 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직접 만든 지도를 보내주며, 동네 여행의 방법을 제시하는데, 마을버스를 타고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것이나 태국 사람들만 가는 동네 맛집을 소개해주는 것들이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혼자 온 여자여행객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처음 만난 나에게 자연스레 삶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마도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받는 여유와 편안함이 그들의 마음을 놓게 했으리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인데, 그들은 어느새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Day off day’라는 이름처럼 앞으로도 우리 집을 찾는 사람이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쉬어갈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란다.
March 2016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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