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필요한 시간 :: THERE
AROUND, Apri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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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필요한 시간
선물이 필요한 시간
마트에서 일어난 일
곰팡이가 핀 노트가 말하게 해준 것
언젠가 만나면 좋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끝나지 않는 여름, 자전거만 타도 갈 수 있는 바닷가,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 가난한 신혼생활을 시작한 우리조차도. 오늘보다 나아질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꿈꿔왔던 것들에 대해 실망의 값을 치러나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 열정을 가졌던 일에, 희망을 품었던 공간에,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 특히 올해가 그랬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더 많은 행복을 쌓아가는 일이면 좋으련만, 소중한 것들을 계속해서 잃어가는 것과 같다는 누군가의 말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월은 다시 꿈꿔야 하는 달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자고 생각했다. 상상도 못 했던 선물을 건네주던 그녀와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기다려왔던 그, 알게 모르게 매달 선물을 받아온 나에 대한 이야기다. 이 글이 한 해를 끝내는 누군가의 아쉬운 마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글·사진 김태연 에디터 김건태
세상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답게, 보라보라에서는 마트마저도 물건이 자주 동났다. ‘오늘은 들어왔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갔다가 달걀을 사지 못한 게 벌써 몇 주째인지 모르겠다. 다이어트에 좋대서 기다렸던 고구마에 대한 희망은 이미 접은 지 오래였다. 내가 이래서 다이어트를 못 한다.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면 하루가 다 갔다. 계란, 토마토, 상추도 없으면서 마트의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와인과 치즈의 모양새가 웃겨서(좋아서) 오도 가도 못 했다. 식료품 코너는 숨은그림찾기 같았다. 난해한 성분표시와 알파벳 사이에 숨어있는 맛들을 포장지 그림 속에서 찾아냈다. 극장이나 패스트푸드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상점 자체가 손에 꼽는 이곳에서 마트는 사실상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소비는 조심스럽고 즐겁게 이루어졌다. 가격도 구비된 물건도 들쑥날쑥해서 사고 싶은 것보다는 살 수 있는 것을 사야 했지만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새로운 언어에도, 처음 보는 화폐에도 적응이 안 되었을 때였다. 마트에서 계산해주는 직원의 입장에서 나는 상당히 귀찮은 손님이었을 거다. 금액이 얼마인지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줘야 알아들었고, 지갑 안에서 뒤섞인 동전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도 한참을 가려내는 어리바리한 외국인. 보다 못한 직원이 직접 동전을 골라갈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내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사라도 씩씩하게 건네는 일이었다. 하루는 잔돈을 골라내던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직원이 물었다. “이거 정말 자주 사 가네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작은 고추였다. 그녀는 자기가 쓰고 있던 화관을 가리켰다. 빨간 고추들이 꽃과 꽃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식용으로만 사용한다고 했다. 그녀는 고추를 입에 넣는 시늉을 하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쓰다듬었다. “맞아요. 정말 맵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다시 마트에 들렀고, 또 와인과 치즈 코너에서 한나절을 헤맸다. (삼만 원이 넘는 와인에 손이 갔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겨우 빠져나와 계산대 앞에 서 있는데 지난번 그 직원이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하얀 봉지 하나를 꺼내주었다. “네 거야.” 뭔가를 놓고 갔었나? 당황해하며 봉지를 열어봤더니 그곳에는 지난번 사간 고추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자주 사 가서 따로 팔기 위해 챙겨둔 건가, 아니면 그냥 선물인가. 물어보지 못하고 십 초 정도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러자 마트의 직원들이 다 웃었다. ‘저거, 또 어리바리 저거.’ 그런 눈빛이었다. 그녀는 봉지 끝을 잡고 살짝 묶더니 내 장바구니에 담아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에서 아주 많이 키우고 있다고, 다음에 또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맙소사. 선물이었다. 고맙다고 말하는 내게 그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썹만 까딱거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눈썹을 까딱이는 건 여기서 ‘응, 그래 그래.’ 정도의 긍정의 뜻이었다. 마트 밖에 나와서도 한참을 멍해 있었다. 빨갛게 익은 고추들을 또다시 쳐다봤다. ‘이 사람들 뭐지? 여기는 정말 천국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하지만 이후로 이곳이 천국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날을 생각했다. 이유 없이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건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래도 삶의 균형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엔 망고를 샀다가 그 다음 날 누군가에게 망고를 한가득 받았다. 집에 망고나무가 많다고 했다. 섬 어디에나 망고나무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쩐지 혼나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그녀의 눈빛에서 우리 할머니가 느껴졌다. ‘허튼 데 돈 쓰고 다니지 말아. 우리 강아지.’ 역시 마트가 최고다.
남편이 아직 남자친구였던 시절의 일이었다. 인사동 거리에서 그와 나의 오랜 친구들이 처음 만났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고, 거리에서는 호떡 구워지는 냄새가 났다. 사실 그 날은 남자친구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그냥 보통 날처럼 지나가고 싶다고. 그 다운 말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샛길에 있던 매장에 들어가 그에게 한지로 된 노트를 사주었다. 처음 만난 친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생일이라고 슬쩍 흘렸던 건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좋아하며 노트를 건네던 친구와, “감사합니다.”라고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의 모습이 모두 귀여워서 나는 조금 웃었다. 한국에 겨울이 오면, 보라보라 섬에서는 덥고 습한 여름이 시작된다. 매일같이 비가 쏟아지는 우기였다. 바다에 떠오르는 무지개, 초록이 짙어지는 숲, 세수만 해도 당기지 않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이 계절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곰팡이도 그랬나 보다. 옷장 속 그늘진 벽, 두꺼운 커튼의 끝자락, 샤워실 구석에 부지런하게 나타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한없이 게으른 주부였지만, 이 기간만큼은 곰팡이에게 따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짝 성실해져야 했다. 베이킹파우더와 식초를 잘 섞어서 타일의 틈을 닦아내고, 모기에 뜯겨가며 환기를 시켰다. 어쩌다 해가 쨍한 날에는 살림살이를 조금씩 집 밖에 꺼내두고 해바라기시켰다. 주말이었다. 해가 좋아서 남편과 함께 습기 머금은 책들을 다 꺼내두고 말리기로 했다. 그러던 중 책 사이에 끼어있던 노트를 발견했다. 지난겨울 인사동에서 선물 받았던, 남편이 최근까지도 한참을 찾았던 그 노트였다. 비닐 포장도 그대로였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거뭇한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그는 실망한 얼굴로 노트를 바라보았다. 막대로 탈탈 털어냈다. ‘안티박테리아 99%’라고 써진 물티슈로 닦아냈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한지가 밀리며 찢어졌다. 그만 버리라고 했더니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생일선물이잖아.”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념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다. 사귀게 된 날이라든지 일 주년 기념일이라든지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에도 모두 심드렁했다. 남편은 생일을 왜 꼭 그렇게 유난스럽게 축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생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나이에.’ 그래서인지 남편이 이번 경우처럼 선물에 애착을 보일 때마다 희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트뿐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물건은 이사를 할 때도 세심하게 챙겨왔다. 때가 탄 그림, 고장 난 카메라, 흔들면 ‘쨍’하는 소리가 나는 종, 작은 조각같은 것들. 챙겨올 뿐 결국 장롱 깊숙이 어딘가로 밀려들어갔지만 결코 버리진 않았다. 빨랫줄에 걸린 책들이 말라가는 내내 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생일선물이잖아.’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이제 와 밝히긴 조금 민망한 마음 하나를 고백하고 싶었다. 말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용기가 난 것이었다. “있잖아. 나 사실 좋아해. 생일…. 크리스마스도, 결혼기념일도 축하해주는 게 더 좋아.” 그랬다. ‘크리스마스니까요.’라는 말처럼 용기 내 고백을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을 좋아했다.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전화를 걸고,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일 년을 더 버텼다는 이유로 축하해줄 수 있는 생일을 좋아했다. 12월이 되면 저도 모르게 들떠서 내년은 다를 것이라 소망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한 날엔 더 쉽게 상처받곤 했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이란. 그래서 더욱 심드렁한 척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한번도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었어.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알았어. 생일이라는 게 그렇게 다 같이 모여 앉아 케이크를 먹고 파티를 하는 날인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만약 너 혼자서 다섯 아들을 키우면 어땠을 것 같아? 우리 집은 카오스였어. 케이크만 사와도 집이 엉망진창 난리가 났는걸. 어느 누구라도 파티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왜 상대방을 위로할 때 하는 단어가 ‘I’m sorry’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미안했다. 그가 생일마다 어딘가 소심해지고, 더 서툴게 굴었을 때 속내를 정확하게 읽어줬어야 했는데. 그의 어린 시절에 닿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고 오해를 하게 된다. 그 오해들이 적절해지는 시기에 우리는 결혼을 했지만 어떻게 우리가 매번 행복하기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결핍이 있고 그래서 외로운 것일 텐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찌질하면 찌질한대로, 서로의 바로 옆에 있어줄 텐데. 물론 그마저도 오해일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좀 더 열심히 선물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그가 가지고 싶어 하던 단종 된 필름 카메라를 수소문했고, 새로 나온 닌텐도를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는 웃긴 소리가 나는 피리, 돌로 만들어진 목걸이, 박스 테이프로 보수작업을 마친 낡은 전자 피아노를 사다 주었다. 남편은 자주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찍을 게 없어도 그렇게 해야지 곰팡이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여전히 우리는 이곳에서 습기 가득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우기가 끝날 때까지, 한국의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바짝 성실하게 굴며 곰팡이와 싸우다 보면 한동안은 외로움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만나면 좋을 달마다 한 번씩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녀석이 있다. 바로 생리다. 중학교 때 버스에서 쓰러진 이후로 오랫동안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정해진 날도 아닌데 불쑥 나타나 집에 잔뜩 있는 생리대를 또 사게 만든 적은 얼마나 많은지. 여러모로 귀찮고 아프고 번거로운 녀석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그러다 연애시대가 시작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 예정일을 넘기도록 녀석이 나타나지 않으면 괜히 초조해졌다. 식은땀이 났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설마. 약국 앞을 서성거리다가 돌아왔던 적도 있었다. ‘늦어도 좋아. 나타나기만 해.’ 그런 마음으로 생리를 기다렸고 그렇게 녀석은 제 날에 곱게 돌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가 되어갔다. 물론 연애시대는 곧 끝이났고 녀석은 다시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게 몇 번의 고마움과 귀찮음을 반복하다가 나는 결혼을 했다. 옆집 부부의 ‘녀석’은 기대를 이뤘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새벽마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에 자다 깬 남편과 나는 또래의 부부를 걱정하다가도, 아이의 포도 알 같은 눈망울을 생각하며 웃었다. 옆집 부부는 우리와 마주칠 때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미안해했다. 남편도 나도 전혀 안 들린다고 대답해주었다. 우리의 약속이었다. 그들도 우리 고양이 쥬드가 발코니를 넘어가 자신들의 집에서 늘어지게 자는 걸 예뻐해 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조금 엉뚱한 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동네이다 보니 소식이 빨리 퍼지는 편인데, 어째서인지 그 아이가 우리 부부의 아이로 잘못 전달이 되어있었다. 이웃집의 그녀도 나도 프랑스인이 아니라서 헷갈렸나 하고 말했더니, 남편은 그게 이유가 아닐 거라며 내 몸을 흘겨보았다. 그래, 뭐 한국에서도 임산부로 오해 받고 지하철 자리를 양보 받은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소식의 진짜 주인공인 아이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함께 웃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오, 아니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녀에게 안겨있는 아이도 포도 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다. 모르겠다. 아마도 나를 보았을 것이다. 아이의 눈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내게 머물러 있었다. 아이를 만지지도, 그렇다고 시선을 떼지도 못하는 내게 그녀는 아이를 건네주었다. 안아보라고 했다. 엉거주춤하게 아이를 안으려는데 그녀가 물었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어?” 결혼한 이후로 스스로도 끊임없이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가 없으면 질문이 많아진다. 그녀처럼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 언제 가질 계획인지 ‘시기’에 대해 물어봤다. 선택지는 없었다. 나의 솔직한 답은 ‘모르겠다’였지만 그랬다가는 길고 긴 설득을 당해야 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마법의 답안이니 참고해도 좋다. 아이를 꼭 가져야 한다는 조언 속에는 선의의 마음이 거의 전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사는 삶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설득하는 수고 없이,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불안감 없이, 자신만의 이유로 행복해지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 백 퍼센트의 확신이 생기는 날을 기다렸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것은 확신이 아닌 함정들이었고 선택은 자꾸만 더 어려워졌다. 결혼도 그랬지만 세상에 완전한 확신이 드는 일이 있을까도 싶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아이가 생길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다. 아직 매달 실망감을 잔뜩 늘어놓는 것으로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지만, 나는 서운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녀석은 거의 이십 년 동안 그대로인데 내 마음은 계속 달라져 왔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싶을 때도, 녀석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고 싶을 때도, 간절하게 기다렸을 때도, 만세를 외쳤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모두 조금씩 애틋하다. 내게도 언젠가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아이가 없더라도, 다시 혼자가 되더라도, 그래서 모두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는 내 몫의 행복에 용기를 들이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오랜 친구가 전화기 속에서 울먹였다. 아무래도 팔자라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영화 속의 조연들은 어떻게 봐도 조연인것처럼 자기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렇게 고생하며 살 팔자인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눈에 내 삶은 온전하게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지난 몇 년간 내게 일어났던 사고들을 말해주었다. 친구는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쓰러지듯 울었다. 자기는 정말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니야, 나야말로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모두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나도 그렇다. 정신 바짝 차리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따뜻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러면 바닥이 꺼질 것 같은 순간이 와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힘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세탁기를 돌리는 평범한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빨랫줄에 걸린 책들이 말라가는 내내 그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생일선물이잖아.’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이제 와 밝히긴 조금 민망한 마음 하나를 고백하고 싶었다. 말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용기가 난 것이었다. “있잖아. 나 사실 좋아해. 생일…. 크리스마스도, 결혼기념일도 축하해주는 게 더 좋아.” 그랬다. ‘크리스마스니까요.’라는 말처럼 용기 내 고백을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을 좋아했다.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전화를 걸고,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일 년을 더 버텼다는 이유로 축하해줄 수 있는 생일을 좋아했다. 12월이 되면 저도 모르게 들떠서 내년은 다를 것이라 소망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한 날엔 더 쉽게 상처받곤 했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이란. 그래서 더욱 심드렁한 척을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한번도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었어.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알았어. 생일이라는 게 그렇게 다 같이 모여 앉아 케이크를 먹고 파티를 하는 날인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만약 너 혼자서 다섯 아들을 키우면 어땠을 것 같아? 우리 집은 카오스였어. 케이크만 사와도 집이 엉망진창 난리가 났는걸. 어느 누구라도 파티는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왜 상대방을 위로할 때 하는 단어가 ‘I’m sorry’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미안했다. 그가 생일마다 어딘가 소심해지고, 더 서툴게 굴었을 때 속내를 정확하게 읽어줬어야 했는데. 그의 어린 시절에 닿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고 오해를 하게 된다. 그 오해들이 적절해지는 시기에 우리는 결혼을 했지만 어떻게 우리가 매번 행복하기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결핍이 있고 그래서 외로운 것일 텐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찌질하면 찌질한대로, 서로의 바로 옆에 있어줄 텐데. 물론 그마저도 오해일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 우리는 좀 더 열심히 선물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생일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그가 가지고 싶어 하던 단종 된 필름 카메라를 수소문했고, 새로 나온 닌텐도를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는 웃긴 소리가 나는 피리, 돌로 만들어진 목걸이, 박스 테이프로 보수작업을 마친 낡은 전자 피아노를 사다 주었다. 남편은 자주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찍을 게 없어도 그렇게 해야지 곰팡이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여전히 우리는 이곳에서 습기 가득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우기가 끝날 때까지, 한국의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바짝 성실하게 굴며 곰팡이와 싸우다 보면 한동안은 외로움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달마다 한 번씩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녀석이 있다. 바로 생리다. 중학교 때 버스에서 쓰러진 이후로 오랫동안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정해진 날도 아닌데 불쑥 나타나 집에 잔뜩 있는 생리대를 또 사게 만든 적은 얼마나 많은지. 여러모로 귀찮고 아프고 번거로운 녀석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랬다. 그러다 연애시대가 시작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 예정일을 넘기도록 녀석이 나타나지 않으면 괜히 초조해졌다. 식은땀이 났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설마. 약국 앞을 서성거리다가 돌아왔던 적도 있었다. ‘늦어도 좋아. 나타나기만 해.’ 그런 마음으로 생리를 기다렸고 그렇게 녀석은 제 날에 곱게 돌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가 되어갔다. 물론 연애시대는 곧 끝이났고 녀석은 다시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게 몇 번의 고마움과 귀찮음을 반복하다가 나는 결혼을 했다. 옆집 부부의 ‘녀석’은 기대를 이뤘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새벽마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에 자다 깬 남편과 나는 또래의 부부를 걱정하다가도, 아이의 포도 알 같은 눈망울을 생각하며 웃었다. 옆집 부부는 우리와 마주칠 때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미안해했다. 남편도 나도 전혀 안 들린다고 대답해주었다. 우리의 약속이었다. 그들도 우리 고양이 쥬드가 발코니를 넘어가 자신들의 집에서 늘어지게 자는 걸 예뻐해 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조금 엉뚱한 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동네이다 보니 소식이 빨리 퍼지는 편인데, 어째서인지 그 아이가 우리 부부의 아이로 잘못 전달이 되어있었다. 이웃집의 그녀도 나도 프랑스인이 아니라서 헷갈렸나 하고 말했더니, 남편은 그게 이유가 아닐 거라며 내 몸을 흘겨보았다. 그래, 뭐 한국에서도 임산부로 오해 받고 지하철 자리를 양보 받은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소식의 진짜 주인공인 아이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함께 웃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오, 아니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그녀에게 안겨있는 아이도 포도 알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다. 모르겠다. 아마도 나를 보았을 것이다. 아이의 눈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내게 머물러 있었다. 아이를 만지지도, 그렇다고 시선을 떼지도 못하는 내게 그녀는 아이를 건네주었다. 안아보라고 했다. 엉거주춤하게 아이를 안으려는데 그녀가 물었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어?” 결혼한 이후로 스스로도 끊임없이 던져왔던 질문이었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가 없으면 질문이 많아진다. 그녀처럼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 언제 가질 계획인지 ‘시기’에 대해 물어봤다. 선택지는 없었다. 나의 솔직한 답은 ‘모르겠다’였지만 그랬다가는 길고 긴 설득을 당해야 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마법의 답안이니 참고해도 좋다. 아이를 꼭 가져야 한다는 조언 속에는 선의의 마음이 거의 전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사는 삶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설득하는 수고 없이, 주류에서 벗어난다는 불안감 없이, 자신만의 이유로 행복해지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서 백 퍼센트의 확신이 생기는 날을 기다렸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것은 확신이 아닌 함정들이었고 선택은 자꾸만 더 어려워졌다. 결혼도 그랬지만 세상에 완전한 확신이 드는 일이 있을까도 싶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아이가 생길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다. 아직 매달 실망감을 잔뜩 늘어놓는 것으로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지만, 나는 서운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녀석은 거의 이십 년 동안 그대로인데 내 마음은 계속 달라져 왔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싶을 때도, 녀석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고 싶을 때도, 간절하게 기다렸을 때도, 만세를 외쳤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모두 조금씩 애틋하다. 내게도 언젠가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아이가 없더라도, 다시 혼자가 되더라도, 그래서 모두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는 내 몫의 행복에 용기를 들이 부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오랜 친구가 전화기 속에서 울먹였다. 아무래도 팔자라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영화 속의 조연들은 어떻게 봐도 조연인것처럼 자기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렇게 고생하며 살 팔자인 것 같다고 했다. 친구의 눈에 내 삶은 온전하게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지난 몇 년간 내게 일어났던 사고들을 말해주었다. 친구는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쓰러지듯 울었다. 자기는 정말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니야, 나야말로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모두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나도 그렇다. 정신 바짝 차리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따뜻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러면 바닥이 꺼질 것 같은 순간이 와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힘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세탁기를 돌리는 평범한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April 2016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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