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 :: THERE
AROUND, May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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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
우리들의 일
나의 일
언니의 일
남편의 일
꽤 오랜 시간 나의 직업은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었다. 도서관, 학교 앞 돈가스집, 대형 마트, 동대문 새벽시장까지. 즐거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젊어서 잠깐 하는 고생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졸업을 했더니 인턴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비정규직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시절보다 낮은 월급을 받기도 했다. 가슴 뛰는 일이니까, 의미 있는 일이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렇게 조금씩, 어떤 의아함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일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살림만 하는 일이어도.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도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글·사진 김태연 에디터 김건태
선풍기 바람 앞의 아이스크림처럼 시간이 녹아내리던 날들이었다. 나의 한가로운 사정을 아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기념품 매장을 운영하는 친구였다. 직원이 갑자기 입원해서 그러니 며칠만 매장 일을 도와 달라고 했다. 서둘러 씻고 집을 나섰다. 친구의 매장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국과 호주에서 출발한 대형 크루즈가 두 척이나 보라보라 섬에 정박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빠르게 흘러나오는 영어에 바짝 긴장했다. 친구는 내 왼쪽 귀에 하얀 꽃을 꽂아주었다. 제대로 설명을 들을 겨를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낚싯줄로 만들어진 우쿨렐레나 조개와 산호초로 꾸민 액자, 흑진주 액세서리에 관심이 많았다. 가격을 알려주고, 새 물건을 꺼내오고, 계산하고 포장했다. “당신은 싱글이 아니군요?”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난 조금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보고 알았어요. 왼쪽에 꽂으면 짝이 있고, 오른쪽에 꽂으면 싱글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섬에 산지 한 두해가 아닌데, 처음 알았다. 나는 바로 꽃을 오른쪽으로 바꿔 끼우는 시늉을 했고 할머니는 크게 웃어주었다. 친절한 분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구석까지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오후 네시였다. 매장은 한가해졌다. 별다른 할 일이 없었다. 마른 천을 들고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쌓여있던 먼지를 닦았다. 로컬 럼주 병에 쌓인, 냉장고 자석의 틈에 쌓인, 우쿨렐레 줄 아래에 쌓인 먼지들. “Come on, breathe!” 친구가 말리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함께 차가운 콜라를 마셨다. 선풍기가 덜덜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매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말린 코코넛 속살을 먹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선풍기 바람에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가끔 관광객들이 들어와도 친구는 일어나려는 나를 말렸다. 가만히 있는 것이 어색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쉬고 있으니 곧 섬의 모든 매장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되었다. 오후 다섯시였다. 두꺼운 자물쇠로 문을 잠그려는데 불쑥 엄마랑 아빠가 떠올랐다. 밤 열시가 돼서야 겨우 셔터를 내리는 모습. 며칠 후, 입원했던 직원이 돌아왔다. 잠깐 동안 허락되었던 ‘일의 시간’은 빠르게 끝이 났다. 마지막 날, 친구는 우리 부부에게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메뉴는 푸드트럭. 매장 밖으로 나오니 하루 내내 비어있던 공터에 푸드트럭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남편도 이미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플레이보이 토끼 간판에 불이 켜진 곳이었다.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놓고 바비큐와 참치 회를 팔고 있었다. 남편과 밖에서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조금 쑥스러웠다. 눈이 마주쳤다. “안녕.” 숯 불에서 구워지는 고기와 해산물의 냄새가 밤공기를 데우는 동안, 친구는 어디선가 맥주를 챙겨왔다. 건배를 했다. 건배를 할 때 꼭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에티켓이라 부릅떴다. 이 맛이었다. 퇴근하고 마시는 맥주의 맛. 팽팽했던 긴장감이 느슨해지며 몸에 피로감이 돌았다. 눈꺼풀이, 허리가, 다리가 무거워졌다. 반가운 피로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그리웠다.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또 우리를 받쳐주기도 하는 것이 일이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술을 마시지 않은 남편이 운전을 했다. 매일 오가던 길인데도 퇴근길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다르게 보였다.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야자수, 느린 바다, 오테마누산이 사당역 환승 통로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딘가 편의점 불빛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비로소 동네 풍경으로 보였다.
우체국 개인 사서함에 안내문이 들어있었다. 한국에서 택배가 왔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보라보라 섬은 편지든 택배든 우체국까지만 배달이 된다. 그래서 보내는 사람도 내가 진짜 사는 곳이 아닌 사서함 번호를 적어야 한다. ‘1013, Borabora.’ 직원에게 안내문을 냈더니 잠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에어컨 바람에 차가워진 스테인리스 의자가 시원했다. 직원이 가져다 준 박스는 크기에 비해 가벼웠다. 언니 이름이 적혀있었다. 가지런한 손글씨였다. 나에게는 세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그 말인즉슨 내 삶에 언니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다는 뜻이었다.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에도 우리는 한 침대를 나누어 쓰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자매애를 갖지 못했던 건 어쩌면 끈적이던 살과 입냄새를 가장 가까이서 느껴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번은 언니가 잠결에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내 코피가 터지기도 했고(실화), 언니는 내가 늘 반쯤 눈을 뜬 채로 자고 이를 갈아서 무서웠다고 했다(소설). 서로가 아쉬울 리 없었다. 오히려 지겨웠다. 저 인간은 언제 대학에 가나 했다. 2016년, 2월. 오늘의 우리는 각자의 침대를 가지고 있다. 언니가 손발을 휘둘러도 내게 닿지 않고, 내가 이를 빡빡 갈아도(만약에 간다고 치더라도) 언니는 들을 수 없다. 언니와 내 침대 사이에는 이제 19시간의 시차가 가로놓여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어째서인지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자주 통화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애틋하기까지 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임신한 걸 알았을 때도 내게 처음 전화를 걸었다. 태명은 꼬물이란다. “남자아이라. 현우라는 이름 어때?”, “옹알이도 잘 안 해. 순하지.”, “몸을 뒤집었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기저귀 하면 기저귀를 가져온다니까. 천잰가.”, “오늘 어린이집 등원해. 이제 다 컸어....”그렇게 꼬물이가 서현우 어린이로 성장하는 동안, 언니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옷을 팔았다. 부모님이 정리하시기 전까지, 평생을 하셨던 일과 닮은 일이었다. 언니는 아빠에게 도움을 구했다. 젊은 사람들의 옷만 파는 곳이었기에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기보다는, 월급을 드리기 위한 핑계였다. 가뜩이나 경기도 좋지 않은데 걱정이 되었다. 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도, 아빠 월급을 드릴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게 어디냐고. 그것을 위해서 시작한 건 절대 아니지만, 지금은 그래서 이 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언니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있는 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남편의 이름도 같이 쓰여있어서 함께 열어보려고 참았다. 국제택배는 무게가 가벼워도 어딘가 묵직한 기분이 든다. 어떤 물건을 사서 망가지지 않게 포장한 후 우체국까지 들고 가 항공 우편으로 보내면, 남태평양 위를 날아와서 타히티를 거쳐 보라 보라 섬까 지 오는데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 묵직함은 너무 얇고 가벼워서 펄럭거리는 나의 행복을 꾹 눌러주었다. 날아가지 않게. 언니의 전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놀라울 만큼 시시한 얘기들을 한다. 로봇으로 변신하는 자동차의 상세한 종류나,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장난감은 금세 동이 나 버려서 얼마나 구하기가 힘든지와 같은 이야기들. 내가 이 지루함을 견디는 이유는 결코 박스 안에 들어있던 것도 남편이 죽고 못 사는 장난감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원피스 피규어들을 사겠다고 둘째를 가진 몸으로 햄버거 가게에서 긴긴 줄을 섰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끼리는 이렇게 시시한 얘기나 할 수 있을 때가 좋을 때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의 시시함이 아주 감사하다.
“자?”, “아니 아직.”, “친구 스위치 켜줄래?” 어느 새벽, 자려고 누워있는 내게 남편이 ‘친구 스위치’를 켜 달라고 했다. 우리 부부의 약속이었다. 한 사람이 원하면 아내나 남편으로서의 역할은 다 내리고 친구의 역할만 올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친구란 보통의 사려깊은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절대 객관적으로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집중해서 들어주고 격하게 공감해주며 무조건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평상시라면 “직장에서 A가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힘들게 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건 너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라든지, “이렇게 저렇게 해봐.”와 같은 판단과 조언이 가능하지만, 친구 스위치를 켜게 되면 할 수 있는 말은 “너무 힘들었겠다. 맥주나 한잔 할까?”가 거의 전부다. “어렸을 때는 꿈이 뭐였어?” 남편이 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꿈. 거의 생소하기까지 했다.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 받으면 되레 기분이 좋아지는 나이가 된 이후로, 이 질문은 어쩐지 과거형이되었다. “너는? 너는 뭐 였는데?”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피자집 주인.” 어렸을때, 꼭 반에 한 두명은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있었다. 나는 영화 에 빠져 시간 여행자가 되고 싶어 했다. 지금은 그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 수줍어지는 기분이지만, 어렸을 때 꿈은 다 그런 거 아닌가. “장 피에르라고 피자집 여러 개 가진 친구 알지? 내년에 그 중 한 곳을 내가 맡아서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는데 해보고 싶어.” 뭐야. 이건 완전하게 불공평했다. 친구 모드로 할 수 있는 얘기인가. 꿈까지 들먹이다니 치사했다. 지금 하던 일은 어떻게 할 건지. 보증금은 있는지. 피자를 만드는 법은 아는 건지. 갖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오가는 동안, 그는 말을 이어 갔다. 다행히 설득력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벌써 마음이 심란했지만, 응원하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렇게 어느 새벽의 내가 잔뜩 쿨한 친구인 척을 해버리는 바람에, 오늘의 나는 밤마다 남편을 장 피에르의 피자가게에 바래다주게 되었다. 그는 일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피자 만드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열다섯살 차이가 난다고 했다. 보통은 가게 앞에 내려주고 바로 돌아오는데, 그날은 피자가 먹고 싶어서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우리의 친구이자 사장님인 장 피에르는 남편이 직접 만든 피자를 먹어 보라고 했다. 반죽을 떼어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잔뜩 쑥스러운 얼굴이 되어 동그란 반죽을 밀었다. 고르게 펴졌다. 도우가 만들어졌다. 어떤 피자를 먹고 싶은지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파인애플 토핑을 올렸다. 치즈를 뿌렸다. 오븐에 넣었다. 금방 구워진 피자를 여덟 조각으로 잘랐다. 포장된 피자를 내게 건네주던 남편은 처음보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얼굴이 남아있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큰한 피자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피자의 맛은 그러니까 정말 하와이안 피자의 맛이 났다. 여덟조각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남편은 조만간 어렸을때 꿈꾸었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나이가 무엇을 시작하기 쉬운 나이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변화 가능한 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가 조금은 부럽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시간 여행자 이후로 무엇을 꿈 꾸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다. 이십 대의 좌표를 돌아보면, 드라마틱한 꿈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실은 줄곧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내가 말하고 내가 들었다. 경제적인 자립은 소중하다. 그러니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해내려고 한다. 세상은 이런 걸 꿈으로 쳐주지는 않는 것 같다. 모르겠다. 나는 꿈이 없다. 내가 아는 건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드문 세상이라 해도, 꿈이 없다는 걸 말하려면 꽤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이다. 꿈의 바깥에도 삶은 있다. 혹시 과거의 내가 정말 시간 여행에 성공해서 이 글을 읽는다면 무척 실망할 것 같다. 부디 그 아이가 ‘친구 스위치’를 켜준다면 좋겠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May 2016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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