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날의 노을 :: THERE
AROUND, May 2016
-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날의 노을
아주 평범하고 특별한 날의 노을
먼 옛날, 기억 속의 노을
매일 저녁, 우리 곁의 노을
오래 전, 먼 나라의 노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 볼 노을
여행한 장소 별로 정리해둔 사진 폴더를 열면, 마지막엔 늘 노을 사진이 들 어 있다. 밤에는 좀처럼 카메라를 들지 않으므로, 하루의 마지막 사진은 해 지는 풍경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매번 다른 장소에서 나는, 노을이 질 때마다 가만히 멈춰섰던 모양이다. 거기 이유란 게 있을까? 그저 서쪽 하늘이 붉게 빛났으므로, 하루가 조용히 저물고 있었으므로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글·사진 김신지 에디터 김건태
봄날의 저녁 하늘은 곧잘 복숭아빛으로 물들곤 한다. 아니 봉숭아 빛이던가. 조약돌로 으깨어 손톱 위에 얹곤하던 봉숭아 꽃잎의 색깔이 꼭 저랬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도 있다. 여름이면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들 위로 노을이 번진다. 여름의 구름들은 바람에 흩어지며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어서 어느 계절보다 다채로운 하늘의 표정을 볼 수 있다. 가을에 지는 노을은 단풍을 닮아있고, 겨울이면 맑고 쨍한 대기탓에 노을이 세밀화로 그린듯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계절보다도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유년의 계절 위로 지던 노을이다. 어렸을 적, 해지는 풍경 위를 길게 가르던 것은 저녁밥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이었다. 흙장난을 하다가도, 강아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달리다가도, 그 부름에 우리는 저마다 집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노는일밖에 하지 않는데 하루 해는 어찌나 짧던지 아쉬움에 머뭇대며 돌아보면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위로, 한번도 그 너머까지 가 본적없는 산 의 꼭대기로도, 아스라한 들판 위로도 붉디붉은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주 걸음이 느려지곤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노을은 누군가 들판에 물감통을 엎지른 것처럼 번져가곤 했다. 이내 마을은 어둠에 잠기게 될터였다. 흙 묻은 손을 털며 일어날 때 우리의 그림자 위로도 노을이 내렸다. 낮동안 한껏 길어진 그림자를 어둠에 조금씩 지워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자라서도, 다른 도시에 살게 되어서도, 노을을 보면 꼭 어딘가로 돌아가야 할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루의 즐거움도, 괴로움도 그만 손에서 내려놓고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이름을 길게 불러주는 이 더 이상 없어도, 노을만은 여전히 고단한 하루 위로 저녁 인사처럼 내린다.
오늘의 노을은 처음보는 노을이다. 그 얘기를 해준건 무대에 홀로선 재즈피아니스트였다. 이른 겨울이었고 아직 눈이 오기 전이었다. 그 해 가을, 그는 단풍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한다. 지난해처럼, 지지난해처럼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지만, 이 잎은 내가 처음으로 보는 잎이겠구나. 이번 봄에 새로 돋은 잎이니까 그럴테지. 그렇게치면 비도, 눈도 내가 처음 맞는 비, 처음 보는 눈,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인 것들이겠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연주를 시작하자, 앨범에 수록된, 그리하여 몇 번쯤 들었을 그의 곡은 오늘 처음 듣는 곡이 되었다. 어떤 노래든 무대 위에서는 ‘단 한번 뿐’인 노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은 그 목소리가 그토록 마음깊이 내려앉았다. 오늘이 처음인 무대, 오늘이 처음인 밤, 오늘 처음 함께 앉은 사람. 객석의 어둠에 몸을 묻은 채로, 나는 오늘의 모든 처음을 생각했다. 하루를 살며 우리는 모르는 채로 그렇게, 매번 처음이자 마지막일수 밖에 없는 순간을 경험한다. 너무나 당연해 자주 잊는 사실. 어떤 순간도 같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노을 앞에서 걸음이 멈추는 마음을 알것도 같다. 우리는 오늘의 노을을 만나,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오늘의 노을과 헤어지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매일의 노을은 그럴수 밖에 없다. 붉은 빛이 같은 붉은 빛일 수도 없고, 구름이, 바람이, 저녁 달이, 그것을 바라보는 오늘의 내가 또 다르다. 가쁜 하루를 살더라도 노을이 질때만은 걸음을 늦추어도 좋지 않을까. 속도를 자각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멈춰설때다. 멈춰서 숨을 고를 때에야 비로소 지금껏 숨이 가쁘도록 뛰어왔다는것을 알게된다. 노을은 그런 식으로 삶의 속도를 늦추게 하고, 우리는 가만히 멈춰서 바라본다. 한 번뿐인 것들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도록, 오늘의 모든 처음을 생각한다.
노을과 함께 여행한 것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평원에서 였다. 한반도의 몇배라든가 그런 크기는 늘 와닿지 않았지만, 밤새 버스를 달려도이 땅의 끝에 닿을 수 없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때문에여정이넉넉지 않은여행자는한도시에서다른도시로이동하기위해이삼일을꼬박 버스에서 지내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장거리 운행을 하는 2층 버스는 좌석이 제법 넓었고, 밤이면 의자를 뒤로 젖히고 단잠을 잘 수도 있었다. 여행자들이 손꼽는 버스의 명당자리는 2층 맨 앞자리였다. 통유리로 된 앞의 창과 양 옆의 창까지 더해지면 그렇잖아도 드넓은 평원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었다. 도시와 계곡과 평원과 호수를 지나, 빙하가 있는 대륙 최남단까지 가는 길. 저녁이면 아득해 보이는 지평선 위로 오렌지 과육을 짠듯한 노을이 진득하게 내리기도 했다. 서른시간 넘도록 버스를 타고 달리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꼭 노을과 노을 사이를 여행하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본 수많은 노을의 풍경이 마음속에 쌓여 있었다. 태풍이 오기 전 불타오르듯 번져가던 하늘, 해지는 바닷가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사람들의 붉은뺨, 드넓은 해바라기밭 위로 촘촘히 내리던 노을.... 그 모든 풍경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도록 생각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속에서, 저녁 안개에 밴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소녀는 그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우리는 아름다워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어도, 적어도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생길는지 모른다. 그래서 소녀의 말은 내게 이렇게 들린다. 아름답게 살고 싶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풍경에 빚지고 산다.
혼자서 먹는 저녁을 차려놓고 적막함을 지우려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한편이 나오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듯 보이는 파란 눈의 사내가 영등포 쪽방촌을 서성인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는 스위스에서 먼 나 라 한국까지 온 철학자이고, 서울의 거리, 평범한 삶으로부터 배우려 한다. 무료 급식소 앞에 줄 선 사람들을 들여다 보다가 그는 비좁은 식당 한편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 행색 남루한 이들이 모인 곳에서, 몸이 불편한 그를 염려하는 눈빛들이 한 번씩 어깨나 등에 머문다. 자원봉사 아주머니는 숟가락질도 힘든 그가 못내 안쓰러웠는지 밥을 김에 싸서 입안에 넣어준다. 식당을 나선 그는 쪽방촌의 좁은 골목을 걷는다. 비를 가린 처마 밑에서 한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추운데 들어가서 차 한 잔 하고 가지 않겠느냐고. 그를 방으로 들인 할아버지는 물이면 된다는 그에게 손수 커피를 타준다. 커피 위로 빨대를 꽂고, 먹기 편하게 종이컵을 들어올려 빨대를 입에 물려준다. 할아버지는 그가 측은하고, 그는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고맙다. 쪽방 촌에서 보낸 십여 년, 추위보다 외로움에 사무쳤을 할아버지는 얼마만의 손님인지 모를 그에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하고 인사한다. 그리웠던 건 그저 누군가의 말소리와 온기였을까. 그리고 그의 손을 끌고서 창문을 열어 비 그친 밖을 보여준다. 이제 비가 그쳤어요. 맑은 날이었더라면 건물들 사이로 노을이라도 번졌을까. 나는 그 옆에 서서 함께 창 너머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시 한편을 떠올린다. 시인은 목련이 지는 일을, 계절이 바뀌는 일을, 밤이 오는 일을, 너와 내가 만나는 일을 ‘번짐’이라 부른다. 봄은 번져서 여름이 되고, 저녁은 번져 밤이 되며, 너는 번져서 내가 된다고, ‘번져야 살지’라고도 말한다. 하늘에 번져가는 노을을 볼때, 나에겐 어김없이 이 시가 함께 떠오른다. 이 모든 것을 ‘번짐’이라고 부르면, 익히 아는 경계들이 가없이 지워지는 기분이다. 노을이 번져 밤이 되듯, 사람은 사람에게로 번져간다. 그 사이엔 경계도 없고, 거리 도 없다. 생生을 그렇게 부르는 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니 매일의 노을에는 그런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차가운 손을 잡아끌어 따뜻한 곳에 들이는 마음. 종이컵에 빨대를 꽂아주는 마음. 그것이 번짐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저물녘처럼 쓸쓸한 이 세상에, 다행스럽게도 노을이 번진다.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 장석남, 『水墨(수묵) 정원 9―번짐』 중에서
May 2016
THEREZINE
남은 글자 수 : 400
에디터가 추천하는 THERE Activity
등록된 액티비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