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펠립네리 광장 :: THERE
AROUND, May 2016
-
산펠립네리 광장
광장에서 만나자는 말
커피 한잔 할까?
노란 꽃잎이 날린다
학교가 하나 있다
우리, 광장에서 만나자
바르셀로나에선 누군가와 만나자는 약속을 할 때 “강남역 뉴욕제과 앞에서 만나자.”라던가 “종로3가역 4번 출구에서 만나자.”라고 하지 않고 “왕의 광장에서 보자.”라거나 “노바 광장에서 보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광장이 나오고, 광장마다 앉을 계단이나 벤치가 있다. 여름에는 그늘이 시원하고, 겨울이면 볕이 따뜻한 이곳의 광장에 앉아있으면 친구가 조금 늦게 오더라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 에디터 이현아
이곳에서 알게된 친구가 커피 한 잔 하자며 나를 불러냈다. “어디서볼 까?”, “왕의 광장으로 올래?”, “그래.” 우리는 광장 한쪽 테라스에 앉아 한 잔에 1유로가 조금 넘는 커피를 마셨다. 대체로 그렇듯 바르셀로나 하늘은 청명했고, 광장 가운데에서는 작은 개 두마리가 서로의 꽁무니를 쫓으며 놀고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관광객이, 건너편에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개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편안한 오후, 춥지도 덥지도 시끄럽지 도 조용하지도 않은 공기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아, 내가 여기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여행은 제법 했지만, 외국에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많이 신기해했고, 조금 부러워했다. 가 까운 지인들은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어려움을 이유로 들며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쉬웠다. 쓰고 보니 ‘쉽다’ 라는 말이 굉장히 적절하다. 살아보니 어디서나 먹고 자는 일은 비슷했다. 적응이 빠른 나는 이곳 생활에 곧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덤덤해 진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신기했던 바르셀로 나의 골목들이 평범하게 느껴졌고 매번 감탄했던 새파란 하늘에도 시큰둥 해졌다. 며칠을 꼼짝않고 집안에만 있었다. 구시가지 좁은 골목 사이에 있는오래된 집에는 한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않는다. 그날 하늘이 어떤 색이었는지도 보지 못한 채 며칠을 방과 거실만 왔다갔다하며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여기까지 와서 무얼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친구가 나를 광장으로 불렀다.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 지어진지 천년은 족히 넘은 오래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이곳에 사는 동안 오래오래 이 하늘 아래 앉아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광장에서 만나자는 친구의 연락을 받은 그 날부터 진짜 ‘바르셀로나 살이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알게 되는 광장이 늘어날수록 바르셀로나와 조금씩 더 친해졌다.
낯선 언어를 쓰는 곳에서 단어를 접하게되면 단어의 원래 뜻보다 소리를 통해 단어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산펠립네리 광장’이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 나는 하늘에서 흩뿌리며 떨어져 날리는 꽃잎을 떠올렸다. 처음 이 광장에 갔을때는 이른 봄이었는데 초록잎을 달고있는 커다란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 여름 이곳을 지나는데, 놀랍게도 노란 꽃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서야 알게된 사실인데 키가 큰 나무 두 그루는 아카시아 나무였다. 그날부터 하루가 멀다고 광장을 들락거리며 나무에 달려있던 아카시아 꽃이 떨어져 광장 바닥을 노랗게 덮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산펠립네리’는 실은 성인의 이름이다. 건물로 둘러싸인 농구 코트 크기 정도의 작은 광장. 가운데 작은 분수대가 있으며, 가장자리에 성당이 있고, 학교와 카페가 있다. 미사 시간이 되면 성당의 철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드나든다. 하교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켜지는 밤이 되면 이곳 젊은이들이 광장 벽에 기대어 조용히 맥주를 마신다.
이 광장에 있는 작은 학교인 산펠립네리 초등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늦은 오후 하교 시간이 되면 광장은 아이들과 아이들을 마중나온 부모님들로 가득 찬다. 그때면 맑은 웃음소리가 벽을 튕기고, 광장에는 활기가 돈다. 하지만 이 학교에는 아픈 역사가 하나 있다. 1938년 스페인 내전 당시 광장으로 포탄이 떨어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학교에는 스무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은 고민 끝에 바로 옆 성당으로 아이들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전쟁 중에도 종교 시설은 건드리지 않는 법이니까. 학교에서 성당까지는 불과 3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 걸어서 1분도 걸리지 않는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포탄이 터졌고 학생들을 포함한 민간인 마흔두명이 희생 당했다. 산펠립네리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성당과 학교 벽에는 그때의 포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한쪽 벽을 그대로 놔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그날의 일을 설명한 작은 동판을 하나 두었다. 바르셀로나의 광장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거리 악사들도 이곳에는 없다. 골목을 돌아 산펠립네리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며 숨을 죽이게 된다. 80여 년 전 이곳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이 떠오르면서 그와 동시에 피지 못하고 사그라든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학생들이 연이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광장은 영화 의 한 장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지만, 중 세 시대의 느낌이 가장 잘 살아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바르셀로나에서 많은 분량을 찍었다고 한다. 그만큼 운치가 있는 곳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에 등장하는 카페도 있다. 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다양한 색깔의 천연 비누를 파는 가게도 있고, 친절한 아저씨가 운영하는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때마다 이 비누 가게에서 비누를 사고, 제철 과일 아이스크림이 나올 때마다 옆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맛을 본다. 그러는 동안 산펠립네리 광장은 나의 일상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며칠전, 친한 친구가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왔다. 나는 내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건넨다. “우리, 산펠립네리 광장에서 만나자.”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좁은 골목골목을 돌아 그곳까지 오며 친구는 알아차릴 수 있을까.
Sabater Hnos 산펠립네리 광장 입구에 있는 수제 비누가게. 전세계에 딱 세군데(바르셀로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베네치아)에 지점이 있는 비누 가게라고 한다. 딸기향, 초콜릿향, 올리브향 등 다양한 색과 향의 비누를 하나하나 들여다 보고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다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참 빨리 지나간다. Un gelato per te 거의 모든 과일이 맛있는 스페인이지만 여름에는 ‘복숭아’다. 이곳은 복숭아 아이스크림이 특별히 맛있는 곳으로 한국 여행객에게도 소문이 나 많이 들른다. 매번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니 어느날 인상 좋은 아르헨티나인 아저씨가 물었다. “한국에는 복숭아가 없어?”
May 2016
THEREZINE
남은 글자 수 : 400
에디터가 추천하는 THERE Activity
등록된 액티비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