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발견 :: THERE
AROUND, Jun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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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발견
여행의 발견
장소의 발견
관계의 발견
겨울의 발견
누구나 ‘여행자’가 되면 평소보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호기심도 강해져 주변 을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 덕에 여행자의 눈에는 길거리의 표지판 혹은 행인의 옷차림과 같은,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소한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여행자 특유의 유난스런 관찰력은 곧잘 작은 발견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술잔을 마주칠 때 꼭 서로의 눈을 바라보더라.’ 혹은 ‘그곳의 버스에는 열림 버튼이 두 종류가 있는데 버튼마다 버스 문이 열리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더라.’와 같은, 단지 주의력만 있다 면 가능한 발견 말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의 설렘은 생소한 어떤 것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때와 다르게 스위스의 작은 마을로 떠난 이 여행은 ‘발견’에 대한 의욕이나 기대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어떤 고민으로 울렁이던 내 마음을 달래느라 주변까지 신경 쓸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외부로 열린 모든 감각을 닫고 내 안으로 파고들 시간이 필요하여 도망가듯 떠난 여행이었다. 그렇게 눈, 귀, 마음을 꼭 닫아 걸은 채 떠난 하룻밤 짜리 여행이었건만 신기하게도 여행의 발견은 어김없이 이어졌다. 글·사진 이진주 에디터 이현아
남편은 각각 다른 상황과 시기마다 딱 안성맞춤인 여행지를 찾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몇번의 여행을 통해 남편의 이러한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 터라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울때면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나있는 편이다. 더구나 금요일 밤에 나에게 남아있는 의지라고는 그저 이번 주말 어딘가로 잠시라도 떠나고 싶다는 미약한 마음뿐이었기에 모든 여행 준비가 그의 소관이 되었다. 갑작스레 하룻밤을 보낼 장소로 남편이 찾아낸 곳은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가 만나는 경계에 자리 잡은 코메어Commeire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알프스 산허리에 있는 이 마을로 가는 도로는 1938년이 되어서야 개통되었다고 한다. 고립된 위치 탓에 전통적으로 거의 모든 것이 마을 내에서 직접 생산되었다. 집집이 감자, 양배추, 호밀 등의 곡물을 직접 재배하여 빵을 만들었다. 동시에 소와 양, 돼지 등의 가축을 키웠고 와인을 담그기 위해 포도도 직접 재배했다. 이러한 자급자족의 생활 방식으로 인해 모든 거주민이 용도가 각기 다른 다섯채의 집을 소유했다. 가족의 생활 이주로 이루어지던 보통의 집 한 채와 가축을 먹이기 위한 건초를 보관하던 나무 헛간, 겨우내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 일년에 두 달간 머무는 포도 밭 옆의 오두막, 그리고 가축이 살던 외양간까지, 꼽아보니 정말 다섯이었다. 최근 들어 삶의 방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주인없이 남겨진 빈 헛간 중 일부가 호텔로 개조되었다. 더할나위 없어 보이는 이 외딴 스위스 마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 여행은 순조롭게 시작하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않는 사소한 이유로 남편과 크게 다투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휴가차 프랑스 알프스의 어느 스키 리조트에 놀러온 한 스웨덴 가족이 산자락에 자리한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점심을 먹던 도중 뜻밖의 눈사태를 만나게 된다. 불가항력적인 위기 상황에서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아이 둘을 레스토랑에 남겨둔 채 홀로 도망간다. 곧 상황이 정리되어 가족들은 다시 모일 수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아이들과 아내는 아버지이자 남편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고,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아버지로서 또 남편으로서 흔히 주어지는 역할을 해내지 못한 남자 역시 자신의 처신에 당황한다. 여행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게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재발견된 그들의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시작된 우리의 다툼은 여행을 같이가네, 마네하는 순간까지 이를 정도로 제법 심각한 것이었다. 결국 출발은 했지만 코메르 마을까지 가는 세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차 안 공기는 냉랭하고 어색했다. 그 어색함은 마을로 올라가는 산길에서 차가 눈에 빠지는 사고가 벌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일반 차로에서 조금 벗어나 눈밭으로 들어선 것이 탈이었다. 얕을 것이라 생각했던 눈은 생각보다 깊게 쌓여 있었고 그 아래의 바닥도 꽝꽝 얼어 자동차 바퀴는 계속 헛돌았다. 설상가상으로 차가 빠진 눈길 1~2미터 앞은 낭떠러지 절벽이었다. 다급히 렌터카 회사에 도움을 청하자 현지의 업체를 연결해주었지만 그 업체는 우리가 불어를 하지 못하자 황당하게도 전화를 끊어버렸다(스위스는 지역별로 통용되는 언어가 다르다. 우리가 사는 바젤Basel은 독일어와 영어가 주된 언어지만 코메어 마을은 지역은 불어만 사용한다). 호텔에서는 구조 차량이 올 때까지 일단 기다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단 둘이 눈밭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 차량을 무작정 기다리게 되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터질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정적을 깨고 대화를 시작하였다. 영화 에서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사고가 우리를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전의 다툼에 대해, 또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화해의 순간, 거짓말처럼 호텔 측의 구조용 차량이 도착했다.
내가 사는 스위스 바젤의 겨울은 냉랭하고 어둑하다. 늘어나는 밤의 길이와 반대로 거리의 인적은 드물어져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덩달아 나까지 쓸쓸하고 우울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래서인지 바젤에 살게 되면서부터 주저없이 겨울을 싫어하는 계절로 꼽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겨울날의 새로운 모습은 그간 겨울에 대한 나의 평가가 참으로 단편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동안 익숙했던 도시의 겨울과 달리 코메어 마을의 겨울은 맑고 아늑했다. 눈 쌓인 지붕에는 새의 발자국이, 길에는 고양이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었기에 겨울의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온전히 마을 안에서만 보낸 이틀 동안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걷고, 먹고, 잠이 드는 것 뿐이었다. 호텔 방은 단출하지만 나무와 돌의 결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눈덮인 산과 마을이 보이는 커다란 창과 테라스가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식사와 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모든 요리가 현지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공기는 차갑지만 바람은 없고 햇살이 강했던 이튿날 아침, 우리는 눈을 맞으며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책길을 걸으며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눈이 내리는 소리였다. 아득하고 부드럽게 나뭇가지에 쌓이던 눈 내리는 소리를 기억하는 한 이제 겨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남을 것 같다.
June 2016
THERE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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