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필름 속 오래된 바다 :: THERE
AROUND, June 2016
-
낡은 필름 속 오래된 바다
여행의 발견
이런 여름이 정말 있었던가 싶어지는
이제는 안부를 물어볼 수 있게 된 것들
우리는 매번 다른 바다에 도착한다
갑작스런 봄 날씨가 찾아온 날, 방 청소를 하면서 구석에 있던 필름 몇 통을 사진관에 맡겼다. 저녁 무렵 찾아온 사진 속엔, 지난 여름 한철을 보낸 바다가 담겨 있었다. 그제야 기억났다. 언제 사고 묵혀 두었는지도 모르는, 유통 기한이 몇 년이나 지난 필름을 그보다 더 오래된 낡은 카메라에 끼워 갔더랬다. 사진이 제대로 찍힌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다행히 사진은 남았다. 오래된 시간을 간신히 새겨둔 듯, 바래있긴 했지만. 글·사진 김신지 에디터 김건태
제 색감을 잡아내지 못한 사진은 어딘가 빛 바래 있었고, 입자도 거칠었다. 그래서일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사진 속 일들이 정말 오래전의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고작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더 지났을 뿐인데. 사진에 담긴 죽도 해변은, 근 몇 년 동안 보낸 여름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학교 동기인 L이 동해안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우리는 여름마다 그곳에 찾아갔다. 처음 갔을 땐 술자리에서 서로서로 멍청함만 겨루었던 L이 제법 숙소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놀랐고, 그 조그만 마을 앞바다에 꽤나 많은 서퍼들이 모여 있어서 두 번 놀랐다. 나만 모르고 있던 영화가 그곳에서 조용히 상영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 서핑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에 앉아 서퍼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곤 했다. 맑으나 비가 오나, 아침이든 한낮이든 서퍼들은 바다에 몸을 맡겼고, 그들의 표현대로 파도가 ‘좋은’ 날이면 그 수가 더 늘어났다. 먼 바다에 동동 떠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은 한여름 물에 띄워놓은 수박들처럼 귀엽기도 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시간이 길수록, 여름의 맛이 깊어지고 있었다.
어떤 여름에 우리는 바라보기만 했던 서핑 보드 위에 직접 몸을 올려보기도 했고, 어떤 여름엔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한참 달렸다가 어둑해져서야 아픈 다리를 이끌고 돌아오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간이 옛날이 되고 만것은, 이제 그 바닷가에 L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이 L의 삶은 바뀌었고, 우리의 삶도 제법 바뀌었다. 누군가 그 곳에 살고있어 그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 좋았던 나는 조금 섭섭했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한번도 가보지 않고 살았을 마을에 추억이 쌓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 마을의 슈퍼 위치와 맛없는 햄버거 가게와 서핑 보드를 매달아놓은 바(Bar)와 강태공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핫스팟과 조개가 유난히 많은 둔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다녀온 곳들은 머릿속에 새로운 지도를 그리며 남게 된다. 뿐만 아니다. 오후 해가 기울어질 때 쯤이면 꼬박꼬박 바다에 나와 수영을 하고 가던 늘씬한 개가 어느 집 개인지도 알고 있고 (심지어 나보다 훨씬 수영을 잘했다), 지난 여름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아침엔 해변에 시커먼 양식장 구조물이 거대한 고래처럼 떠밀려 왔던 것도 알고있다. 그래서 이제, 이전엔 모르고 살았던 마을의 안부를 궁금해 할 수도 있게 됐다. 수영이 취미인 그 개는 올 여름에도 멋진 영법을 보여줄는지, 태풍은 무사히 지나갈는지, 서툴렀던 지난 여름의 서퍼들은 올해 좀 더 오래 파도를 탈 수 있게 되었을지.
실은 여기에 그 동안 내가 당도한 바다의 풍경들을 모아두고,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많은 바다 사진을 하나 하나 꺼내는 동안 깨달았다. 한데 모아서 잇고 또 나누며 얘기하기엔 각각의 순간들이 너무 넓고 깊었다. 그 속에 담긴 바다처럼. 매번 바다를 찾아간 이유도 달랐고, 어떤 날은 이유없이도 문득 바다에 도착하기도 했고, 거기서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난 적도, 섬처럼 내내 혼자인 적도 있었다. 밤의 해변을 뛰어다니며 폭죽을 터뜨리는 것처럼 내내 즐거웠던 한 시절이 있었고, 비 내리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등대처럼 외로움이 너무나 견고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바다는 늘 달랐다. 내가 보는 바다는 사실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단 하나의 바다일 뿐인데, 매번 다른 바다에 당도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꼭 시간에 대한 은유 같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가 본 바다, 그것도 이 오래된 사진처럼 빛 바래고 희미하게 남은 몇 몇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바다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채로도 우리는 이 생에서 내내 바다를 찾게될 것이다. 그러고 싶어서도 있겠으나 그럴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더 많을는지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의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지 않던가.’
June 2016
THEREZINE
남은 글자 수 : 400
에디터가 추천하는 THERE Activity
등록된 액티비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