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rboretum, 수목원에서 :: THERE
AROUND, 11th Oct 2017
AROUND Magazine
vol.14
From Arboretum, 수목원에서

봄이 온 후,
주변의 몇 사람이 ‘천리포수목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한 귀로 흘려 들었지만, 세 번째 사람이 “천리포수목원 혹시 가봤어? 거기 정말 좋은데”라고 말하자 더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곳의 나무들이 ‘올봄이 지나기 전에 꼭 한번 놀러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신호를 보내온 것 같았다.

낯선 사람과 함께 걷기
수목원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수목원 해설 안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문 교육을 받은 수목원 해설가와 함께 산책하며 수목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서비스. 수목원은 처음이었기에 누군가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신청했지만, 낯선 사람과 함께 수목원을 걷는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숲은 혼자 넉넉한 마음으로 걷는 게 좋을 텐데….’하는 걱정을 안고 천리포수목원 입구에 도착. 수목원 안내를 도와줄 낯선 여자분이 마중을 나왔는데, 그녀의 첫 마디에 ‘아, 괜한 걱정을 했구나.’ 하고 안도했다. 안개가 많이 껴서 사진 찍을 걱정을 하는 내게 그녀는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수목원 바로 옆이 바다라 종종 해무가 올라와요. 언제 사라지겠냐고요? 글쎄요. 자연이 하는 일이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 얘기 나누면서 좀 더 기다려봐요.”

나무를 심은 사람, 민병갈
Q ‘자연이 하는 일’이란 말이 좋네요. 이 수목원이 생기게 된 계기가 좀 특별하단 얘기를 들었어요. A 저희 수목원을 만든 원장님의 성함은 ‘민병갈’이에요. Q 어릴 적 꽤나 놀림 받았을 이름이네요. A 다행스럽게도 그는 어렸을 때,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라는 이름을 사용했어요. 미국인이었거든요. 1945년, 그의 나이 24살에 미국 정보장교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가 한국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 정착하셨어요. 한국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국에 있는 가족의 만류도 뿌리치고 한국인으로 귀화했습니다. Q 장교로 한국에 오셨는데, 어쩌다가 수목원의 원장님이 되었을지 궁금해져요. A 1962년 원장님이 태안(천리포수목원이 있는 도시)을 찾았을 때, 한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딸을 시집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며 땅 2,000평을 사달라고 부탁했대요. 그때 당시 천리포는 교통도 불편하고 땅도 황무지였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이 땅을 사들였어요. 그때부터 오롯이 혼자 이 황폐한 땅을 일궈 지금의 천리포수목원을 만드신 거예요. Q 그게 가능한가요? 바닷가 옆이라 땅에 염분도 많았을 텐데요. A 소금기가 많아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땅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연못을 파서 그곳에 물을 길어 식물들의 젖줄을 만들었어요. 식물들이 잘 자라는 환경과 국내외에서 다양한 종의 씨앗을 구해 심으셨고요. 미국에서 화학을 전공해서 처음부터 식물에 대해 잘 알던 분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두툼한 식물도감을 줄줄 외울 정도로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하셨죠. 식물과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이곳에서 남은 생을 다 보내셨어요. Q 지금 옆에 보이는 연못이 혹시 그때 판 연못인가요? A 맞아요. 입장객의 눈을 즐겁게 하려고 만든 연못이 아니라, 식물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든 거죠. 이 수목원에 있는 것들은 아름답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어요. 처음부터 원장님이 원한 것은 ‘나무가 행복한 수목원’이었어요.




나무가 행복한 수목원
Q 어떤 것이 나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요? A 입장객을 끌기 위해 식물에 해를 끼치는 일을 자제해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거나 인공적으로 모형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한 가드닝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요. 예쁜 색의 수선화 사이에 민들레가 핀다고 해서 뽑지 않아요. 그 공간이 수선화들을 위한 자리이긴 하지만, 민들레 씨가 그곳에 날아왔으니 민들레를 위한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그걸 뽑을 이유는 없어요. 흔한 들꽃이라도 그 아이는 분명한 생명체에요. 가끔 어떤 입장객분들은 “이런 잡초는 뽑아버려야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저희는 그런 걸 원치 않아요.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자연의 흐름에 맡겨 두는 거죠. 사람이 지나는 길 쪽으로 가지가 나 있다고 불편해하지 마시고, 조금씩 돌아서 가주세요. 이곳은 식물들을 위한 곳이니까요. Q 그러고 보니, 식물들이 좀 순서 없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해요. A 자꾸 이렇게 얘기하니 수목원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겐 조금 죄송한 일이지만, 사람이 보기 좋은 위치에 식물들이 심어져 있지 않아요. 지금 식물이 있는 자리는 그들이 원하는 빛, 온도, 습기 등을 만족스럽게 얻을 수 있는 자리에요.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인 거죠. Q 원장님이 남긴 유언이 있었을까요? A 묫자리 대신에 나무를 하나라도 더 심기 원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뜻을 지켜드리지 못했어요. 2012년이 되서야 수목장으로 옮겨드렸죠. 수목원 내 목련 아래에 원장님을 모셨어요. Q 왜 목련이었나요? A 유독 좋아하신 나무였어요. 해안가라 춥고 바람도 많아 여러 식물이 적응하지 못했는데, 목련이 잘 적응했다고 해요. 기특한 목련의 모습에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천리포수목원을 돌다 보면, 자연스레 바다가 보인다. 나무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는데, 가까이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저씨의 것. 소리가 꽤 큰데 아저씨는 듣지 못하고 단잠을 잤다. 코까지 골며 행복하게 자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 깨우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아내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와서 그렇게 자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웃었다. 두 분이 함께 그 자리를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아내는 숲을 좋아해서 이곳을 찾았고, 남편은 귀찮음에 이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흔한 레퍼토리가 떠올랐다. 아니면, 아저씨가 숲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이런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수목원이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숲을 거닐고, 바다를 보다가 스르륵 잠드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람들은 멀리서도 이곳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 AROUND Magazine vol.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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